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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기2011/10/21 18:32


EBS 지식채널e에도 소개된 적이 있는 간송 전형필에 대한 책을 최근 읽었다.

조선 10대 갑부이면서도 조선의 문화재가 일본으로 반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재산을 아끼지 않고 수집한 그는
우리 민족의 '정신'을 지키는 한 다시 일어설 수 있다고 믿었다.

서울 아파트 수십채, 수백채에 달하는 가격을 지불하고서라도 지켰던 그가 있었기에
오늘날 우리가 교과서에서 자주 보는
고려청자 상감운학매병을 비롯한 수많은 문화재가 국내에 남을 수가 있었다.

책과 TV에 여러차례 소개가 되었고
그가 남긴 문화재는 그가 남긴 또하나의 유산인 간송박물관에 잘 보관되어 있으니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그의 노력과 정신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1. 그의 선택 

재산이 많다고 누구나 그와 같은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재산이 많은 다른 조선의 갑부들 중에서 그들의 재산을 뜻깊은 일에 사용한 이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일부는 재산을 더 증식하기 위해, 일부는 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일부는 자신만을 위해 사용했을 것이다.

만약 일부가 문화재를 지키기 위해 그와 같은 일을 했다 하더라도
실제로 독립이 여의치 않자 대량으로 처분하기 위해 문화재를 내놓았던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보건대
간송 전형필이 이를 끝까지 지켜냈다는 것은
그는 '독립'(할때 문화재의 가치가 상승할 것을 노린)과는 관계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일을 추진했음을 알 수 있다.

누군가 비난을 할지도 모른다. '내가 그런 재산을 갖고 있다면 나 역시 그렇게 할테니, 그는 대단한 일을 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조용히 되물어보자.
'재산을 갖지 못한 현재의 당신(나)이 지금, 이 자리에서 조그만 일이라도 하지 못한 것이라면 
 그때 그 자리에서 환경이 달라졌다고 하더라도 역시 못할 것이다'



2. 외사촌 형. 월탄 박종화

역사소설로 유명한 월탄 박종화는 간송 전형필의 외사촌 형이다.
한세대 이전의 분들에게는 익숙한 이름인 박종화는 
요즘 잘 읽히고 있는 이문열의 삼국지 한세대 이전에 우리나라 대표적인 삼국지 연의를 지은 분이다.

어린 시절 주로 외사촌 형에게서 책을 빌려 읽은 전형필이
자연스럽게 민족의식과 시대에 대해서 고민했을 것이라고 충분히 상상해봄직하다.
돌이켜 보면
이러한 토양과 배경이 훗날 그를 이끈 토대가 되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사회주의 운동이 일제시대에 유입되었을때
'나는 부르주와 배경의 사람이니 내가 어줍잖게 사회주의 흉내를 낸다고 한들, 그것은 진심으로 한 것이 아닐 것이다.
 차라리 절필하느니 못하다. 차라리 민족의식을 고양할 수 있는 역사소설을 쓰겠다.'라는 말을 던진
솔직한 박종화의 에피소드를 보건대
그들의 집안은 오늘날 우리가 그리워하는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제대로 보여주는 본보기가 아닐까 싶다.
명문가란 이런 집안을 일컫는 것이리라.

덧) 요즘 결혼 적령기에 오고가는 말 중
     흔히 '집안이 좋다'라는 말이
     언제부터 '돈이 많은 집안'의 동의어로 사용되기 시작했는지 씁쓸하다. 그냥 '돈'이 많다고 하자.



3. 그의 인생. 그의 마무리

이미 돌아가셨지만 개인적으로 전형필 그 분에게 꼭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다. 
'스스로 생각하시기에 당신의 인생을 어떻게 평가하시나요?'

전 재산을 투자한 박물관이 남았지만
해방직후 6.25를 거치면서 많은 문화재가 소실되고, 또한 토지개혁과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재산이 다 없어진 상황에서
그의 말년에 동포와 민족, 국가는 그에게 충분히 감사를 표했을까
그는 스스로 행복하게 그 결과를 바라보았을까
아무도 찾지 않고 오히려 경제개발로 분주한 조국의 모습속에서 오히려 그늘에 위치하지 않았을까
혹 상실감과 배신감을 느끼지는 않았을까

비록 대답을 얻을 수는 없지만 마음 깊은 한 구석에서 
그 분이 꼭 행복하셨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아마 다음의 사진을 보면 그랬으리라.


고맙습니다.





 

Posted by 고구마장수
메모2011/10/14 00:48

1. 첫번째 생각

가끔은 걸음을 멈추고 잠시 머물고 싶게끔 만드는 순간이 있다.
조용한 숲속길을 밤늦게 산책을 하다가 발견한 훈훈한 조명아래 어느 벤치
마침 좋아하는 음악이 흘러나온다면
잠시 걸음을 멈추고 큰숨을 들이마시듯 음악을 한모금 마실 수 있다.

왜 평소에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을까.
마냥 걷기 위해 무턱대고 걷는 것이 아니라
걷는 순간 느끼는 여유로움과 분주한 일상으로부터 마음의 비움을 원했던 것이 아니었던가

왜 평소 우리는 멈추지 않는 것일까



2. 두번째 생각

다음 행선지와 다음 일정이라는 생각을 떠올릴 때마다
그 '다음'이라는 단어는 누가 결정한 것인가라는 생각이 든다.
만약 '이곳과 이시간'이 마음에 든다면
마음내키는대로 한동안 머무를수도, 내일 똑같은 시간에 다시 한번 방문한들 무엇이 문제일까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인가
더 많은 것, 더 다양한 것을 경험해야만 된다는 강박관념에 쫓기고 있는 듯 하다.
만약 테라스에 앉아 햇살을 받으며 즐겼던 홈메이드 식사가 마음에 든다면
굳이 '일정'이라는 것에 쫓겨 내일 아침에 또 방문 못할 이유가 무엇일까
더 많은 것
더 다양한 것이 아닌
현재의 경험을 충분히 누리고 누리고 마음속 깊이 끝까지 누리는 것.

아이들은 매번 똑같은 동화책을 보고 마냥 즐거워하지 않는가
우리는 언제부터 그러지 못했는가



3. 세번째 생각

내 속에는 내가 너무도 많다.
불행히도 그 수많은 '나'는 어느 순간부터 '내'가 아니라
'타인'이 바라는 낯선 '내'가 되고 말았다.

자녀로서의 나. 부모로서의 나. 배우자로서의 나. 직장인(학생)으로서의 나.
구직자로서의 나. 집단속의 나.
힘들어하지 않아야 하는 나.
강해져야만 하는 나.
참아야 하는 나.

그 결과
내가 원하는 '내 삶'이 아닌, 내가 '살아내야만 하는 타인의 삶'이 되어버린다.
나 자신은 어디에 있을까



4. 네번째 생각

비워야만 더 채울 수 있다.
아니다. 채우기 위해서 비우는 것이 아니라
원래 우리는 많이 채워넣는 존재가 아니라서 적당히 채워야 하기 때문이다.
모자람도 없이 지나침도 없이

왜 우리는 더 채워야만 한다고 생각할까
물질에 대한 Mammonism 뿐만 아니라 정신에 대한 Mammonism은 대체 어디서 시작되었을까
비운다. 비워라.



5. 다섯번째 생각
 
여행에는 세가지 종류가 있다.
어디로 가는가
누구와 가는가
무엇을 하는가

세가지 종류의 차이점은 명확하다.
어디로 가는지의 첫단추는 목적지에 대한 조사부터 시작된다.(목적지가 중요하다)
누구와 가는지의 첫단추는 일행에 대한 선발부터 시작된다.(목적지는 덜 중요하다)
무엇을 하는가의 첫단추는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라는 질문에서 시작된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라면
인도양 어느 무인도에
만화책 백여권을 이민가방에 채워가서
컵라면을 후후 불어가며
한달간 해변 텐트에서 낄낄 거리며 있다온들
지구상 어느 크루즈 여행보다 더 신나지 않겠는가

왜 당사자인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는 묻지 않을까
여행사가 정해놓은 '장소'를 '자신'보다 더 우위에 두는가



6. 여섯번째 생각
 
극기 : 자신을 극복하다. 이기다.

'극기'하지 말자.
나는 쳐부셔야 될 경쟁상대나 적이 아니다.
나는 감사의 대상이며 격려와 배려의 대상이다.



7. 일곱번째 생각

느리게 걷는다.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빨라진 걸음에 쓴 웃음이 난다. 다시 느리게 걷는다.
이 길을 빨리 다 걸어야만 된다는 강박관념. 그것에 사로잡히지 말자는 생각을 하면서도
몇분도 안 지나 다시 빨라지곤 하는 걸음.
눈앞의 조용함. 밤공기의 시원함. 은은한 가로등 아래 오솔길. 저멀리 보이는 벤치
앞에 펼쳐진 야경을 즐기면서도
더 좋은 더 아름다운 무언가가 저너머에 더 있을 것 같은 생각에
지금의 순간을 느끼지 못하는 조급함과 욕심들.

그냥 멈춰서서 주위를 둘러본다.
그제서야 스쳐지나간 공간들이 눈에 들어온다.
예쁜 고양이도 보이고 조용한 수평선도 보인다.
느리게 걷자. 우리는 느리게 걷자.

오늘 저녁에 만난 홈메이드 식당의 토스트는 참 맛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내일도 또 가면 좋겠다.
그러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굳이 메뉴를 매번 바꿔가면서 여러가지를 먹어야 되는 직업상 품평가가 아니라면.
아침이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스친다.
저녁식사와 늦은 밤 산책도 마음에 들지만
동일한 코스를 아침식사와 새벽 산책으로 재방문하는 것은 또 어떨까라는 호기심이 든다.

어느 장소에 멈춰서야만 느낄수 있는 시간의 의미처럼
여러 시간대로 느끼는 공간의 의미는 또다른 즐거움을 준다.







 

Posted by 고구마장수
책 읽기2011/09/19 19:58
1. 94년 겨울. 또 다른 한권의 책

유태인 출신이면서 한때 사회주의자의 길을 걸었고 맑시즘에 환멸을 느껴 그 반대편에서 개인의 가치를 주장한 인물.
그에게는 맑시즘(좌)이나 파시즘(우)이나 전제주의라는 측면에서 둘 다 똑같은 적이었다.

선배가 추천해 준 칼 포퍼(Karl Popper)는 
대략 위의 설명과 함께 소개되었던 걸로 기억한다.
막상 그의 책 "열린사회와 그 적들"(The Open Society and its Enemies)을 읽은 것은
그로부터 5년이 지난 99년 여름이었지만
책을 여는 순간 가물가물해진 소개를 한번에 되살려 준 서문의 구절.


열린 사회를 지지하며 (BC 430년)
오직 소수의 사람만이 정책을 발의할 수 있다 해도, 우리 모두는 그것을 비판할 권리가 있다. (페리클레스)

열린 사회를 반대하며 (약 80년후)
무엇보다 가장 으뜸가는 원칙은 여자든 남자든 아무도 지도자 없이는 안된다는 것이다. 어느 누구의 마음도 전적으로 자기 스스로 무언가를 하게끔 습관화되어서는 안된다. 그것이 열성적으로 하는 것이든 장난삼아 하는 것이든 마찬가지다. 오히려 사람들은 전쟁때나 한창 평화로운 때에 그의 지도자에게 눈을 돌려 그를 따라야 한다. 그리고 사소한 일까지도 지휘를 받아야 할 것이다. 예컨대 그렇게 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을때나 잠자리에서 일어나거나 움직이거나 씻거나 먹거나 해야 할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사람들은 오랜 습관에 의해 결코 독립적 행동을 꿈꾸지 않고 전혀 그런 짓을 할 수 없게 되도록 자신의 영혼을 길들여야만 한다. (플라톤)




2. 나에게 남겨진 흔적

책을 읽은 지 10년이 지난 시점에 이 글을 작성하는 이유는 그 책이 남아있는 흔적때문이다.

인간은 신뢰할 수 없는 존재이며, 나약하고 타락했으며 부족한 존재이기에
누군가 우수한 존재 - 그가 성인일수도, 군자일수도, 위대한 철학자일수도 있지만 - 에 의해
인도되고 교화되어야만 한다는 생각.
이는 맹자의 성악설일수도 있고 플라톤의 사상일수도 있고, 교육과 규율을 강요하는 현대 교육의 정신일 수도 있다.

반대로
인간은 스스로 성장할 수 있는 존재이며 스스로 선을 찾을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며
누군가 외부에 의하지 않고서도 스스로 자립할 수 있다는 생각.
이는 순자의 성선설일수도 있고 페리클레스의 사상일수도 있고 자율을 강조하는 극단적 개인주의의 또다른 모습일 수도 있다.

'그 중간은 없다'는 것이 나에게 남겨진 이 책의 흔적이다.

신뢰란
100%신뢰만 있을 뿐, 90%의 신뢰와 10%의 감시란 '신뢰'가 아니다.
믿음이란
100%믿음만 있을 뿐, 특정 부분만 믿고 다른 부분은 믿지 못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진정으로 인간의 가치와 창의성, 자유로움이 우리가 혹은 당신이 추구하는 것이라면
그 가치와 자유로움, 생명력이 빛을 발할 수 있도록
그것에 전적으로 맡기는 것이 올바른 방법일 것이다.

저자의 핵심 사상과는 꽤 동떨어진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이지만
칼 포퍼가 주장하듯
개인의 자유로움이 중요한 가치라면, 열린사회와 그 적들을 이렇게 읽어내는 것도 저자에 대한 또다른 긍정일 것이다.
주 : 완전 제멋대로 끼워맞추기 아전인수격 해석. :)





 
Posted by 고구마장수
책 읽기2011/09/16 20:26
암기과목을 좋아하지 않는, 아니 죽어라 싫어하는 성격상 그 방면으로는 도무지 흥미가 없다.
그 귀차니즘을 스스로 변호하기를
'이해하는 것이야 말로 진정으로 지식을 얻는 것이다'라고 스스로를 위안하는 습성상
토마스 무어의 유토피아, 몽테뉴의 수상록, 경험론의 베이컨, 데이빗 흄과 같은 이름(이라 쓰고 '용어'라고 읽는다)은
전혀 기억에 없다.

대신 언젠가는 - 그 언젠가는 대학을 입학하면이라고 상상했다. 그 시절엔 - 그 용어들을
찬찬히 읽어볼 마음은 꽤 많았다.
그건 단지 '왜 그것들이 외울만큼, 외우게할만큼 중요한가'라는 호기심에서 나온 것이었는데
역설적이게도 암기과목을 좋아했던 친구들은 정작 그 용어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 중 하나가 '십자군 전쟁'에 관한 것이었다.

그 당시는 전쟁이야기라서 솔깃한 것도 있었고
유명한 인물들(사자왕 리처드, 붉은수염 프리드리히대제)에 이끌린 것도 있었지만
막상 시간이 나서 살펴볼 무렵에는 그다지 자료가 많이 없어서 쉽게 포기한 기억만 어렴풋이 난다.



1. 카노사의 굴욕 : 자존심이 강한 젊은이에게 가해진 굴욕이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가?

카노사의 굴욕 (독일어: Gang nach Canossa; 이탈리아어: l'umiliazione di Canossa)은 1077년 1월경, 신성로마제국의 하인리히 4세가 자신을 파문한 교황 그레고리오 7세를 만나기 위해 이탈리아 북부의 카노사 성으로 가서 관용을 구한 사건을 말한다. 교회의 성직자 임명권인 서임권을 둘러싸고 분쟁하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로마 교황의 대립의 정점에 있었던 사건으로 이후 교회의 권력에 세속 권력이 굴복한 대표적인 사건으로 지칭 된다. (출처 : 위키피디아)

교황권이 세속권력을 굴복시킨 대표적인 사건으로 '암기강요'를 당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역사에서는 생략된 중요한 부분이 있는데 그건 하인리히 4세가 20대의 젊은 황제라는 점이다.
야망이 강한 젊은이에게 입힌 굴욕은 반드시 보복을 당하기 마련인데
그 이후 젊은 황제는 평생을 거쳐 교황권을 고립시키려고 했었고
마침내 2명의 교황을 선출하도록 부추겨 교권을 분열시키는데 성공한다.

이후는 교권에 대한 속권의 우위가 이어진다. 이게 카노사의 굴욕의 진면모이다.
(쳇. 우리나라 역사책의 기술이란.....)



2. 그에 대한 교권의 자구책. 등장하는 유명한 어구 : "Deus Lo Vult!!!!"

"신이 그것을 바라신다" (Deus Lo Vult)

우르바누스2세의 이 한마디는 
성지 예루살렘의 회복을 위해서도 아니고, 순례자들의 안전을 위해서도 아닌
교권의 회복을 위한 비장의 무기였던 것이다.
: 성지 예루살렘을 회복한다는데 그 어떤 왕이 거절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한마디가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 터전, 보금자리와 행복을 앗아가게 만든
전쟁의 시초가 되었다.

어찌보면 아니러니컬하게도
개인(황제,교황)간의 자존심 다툼으로 인해 저 멀리 떨어진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이 없어지게 되었으니
그런 의미에서 그 두명의 주인공은 전범 그 자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3. 행간을 읽는 즐거움. 인문학의 독서

시오노 나나미의 신작 <십자군 이야기>는 이러한 저자의 해설을 바탕으로 시작된다.

인문학의 즐거움이란
이렇듯 역사책에 한두줄로 요약되어 있는 행간속을 파고들어
그 사이에 있는 의미를 풍부하게 이끌어내는 바로 그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카노사의 굴욕과 그로 인한 젊은 황제의 상처입은 자존심.
그 나이 27세였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교권을 추락시키기 위해서는 교황선거(황제의 이점인 세습제가 아닌)를 이용한 교활함.
다음 교황이었던 우르바누스2세의 타개책. 신이 그것을 바라신다까지.

한줄 한줄의 행간을 탐험하는 그 즐거움이야말로
진하고 깊은 머리속의 채움이 아닐런지.
또한 그것이 역사적 사실이기에 더 숙연해지면서
그 행간에 있는 의미가 곧 나에게도 거울이 된다는 교훈앞에서는
늘 겸허하게 자신을 가다듬게 된다.



4. 덧붙임

원래 이 책은 십자군 전쟁보다는
예전부터 몹시 알고 싶었던 어느 인물 때문에 골랐던 책이다.
서양사중심의 사관들이 꽤 외면했던 매력적인 인물. 참고로 몹시도 기다려진다. 언제 나오려나.

아직 그 인물은 나오지 않았지만 외외의 선물을 받았다.

젊고 강하고 빠르며 신뢰할만한 인물.
승부욕이 넘치지만 대의앞에서는 숙일 줄 아는 인물.
대범하면서도 신중한 인물.

옆에 있다면 주말에 맥주라도 한잔 권하고 싶은 친구.
반갑다. 탄크레디.(Tancredi)














 
Posted by 고구마장수
책 읽기2011/09/15 20:24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 오랜만에 꽤 재미있는 흥미위주의 소설을 읽었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재미 만큼은 최근에 읽은 소설 중에서는 손에 꼽을 만한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잠시 시간이 지나고 다시 생각해보니
이게 그냥 덮을 만한 책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점점 더 깊어졌다. 왜. 무엇이.




1. 책장을 열며 : 고대 로마 속으로 "지식인, 권력에 맞서다"

여기
살인사건의 변호를 맡은 신참 변호사(키케로)과 그를 돕는 사설탐정(고르디아누스)이 있다.


그 살인사건은 아버지를 죽인 아들에 대한 건으로, 이미 아들은 모든 것을 포기한채 사형만을 기다리고 있다.

사건을 조사하면 할수록 아들의 무죄 가능성은 더 분명해지지만
그와 반대로 살인죄로 고발한 원고뒤에는
로마 최고의 독재자의 측근들이 연루되어 있다는 것도 뚜렷해진다.


백주 대낮에 멀쩡히 길은 가다가도 칼을 맞는 세상에서
용감한 젊은 지식인들은 온갖 무시무시한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고난끝에 법정에 선다.

그리고 그 유명한 키케로의 변론이 이어진다.

* 참고 : 이 키케로의 변론은 역사적인 사실로서 기록에 남아있다.

그는 독재의 권력에 억압된 민중들의 가슴에 호소하면서 놀라운 웅변술로 좌중을 감동시킨다.
권력자의 위신은 훼손되었고 그 변호사는 단숨에 저항의 상징으로 등극한다.
피고는 무죄다. 



고대 로마의 완벽한 복원이라는 배경하에 잔인하며 에로틱하면서도
마지막에는 절대권력을 고발하는 지식인의 도전까지 어디 하나 흠잡을데 없는 놀라운 소설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가슴속을 시원하게 뚫어주는
그런 청량감마저 덤으로 느끼게 해주니 말이지.




2. 책장을 넘기며 : "지식인, 너는 무엇을 향했는가?"

그런데 이 소설이 그렇게 만만하게 끝나지는 않는다.

사실 살인죄로 기소된 아들은 실제로 '살인'을 저지른 죄인이다.
그리고 변호를 맡은 키케로는 그 사실을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아니 알면서도 최후변론에 나섰고
오히려 '무고한' 권력자 측근그룹을 고발해서 피고가 혐의없음을 얻어냈다는 내용이 마지막 몇장에서 밝혀진다.


아니...... 왜?
 

방금까지 읽은 열띤 관중의 박수와 호응. 얼굴찌푸린 독재자 측근의 퇴장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는 왜 유죄임을 알면서도 무죄를 주장해서 거짓승리를 얻어냈는가?
진실의 옹호자요 수호자였던 그는 실제로는 기만자요 사기꾼이란 말인가?


여기에 키케로의 고백이 나온다.

   로마의 독재자를 공개된 장소에서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변론으로서 고발할 수 있다면
   그리하여 그 독재에 억눌린 민중의 가슴에 저항의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한 사건의 유무죄를 뛰어넘어
   우리 로마의 위대한 공화정 정신을 살리는 진정한 길이라고 생각한다.




3. 책장을 닫으며 : "정의란 무엇인가? 나는 어디로 향하는가"


사건의 유무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공화정의 정신을 살리는 것이
진정으로 지식인이 해야될 사명이라고 생각했던 키케로.(정의≠진실)

정의란
진실과는 관계가 없다는 생각했던 그에게

그날 밤 방문한 절대 권력자 루키우스 술라는 다음과 같이 답변한다.

   "당신은 도의에 대한 망상, 자신의 본성에 대한 망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교활한 여우이니, 다른 감각들은 미덥지 않을지 몰라도 코만은 아직 예민합니다.
    이 방에서는 또 다른 여우의 냄새가 나고 있어요. 내 말 명심하세요, 키케로.
    당신이 인생에서 선택한 길은 결국 한 곳으로 통하게 되어 있고, 그곳은 바로 내가 서 있는 자리입니다.
    그 길이 당신을 거기까지는 데려가지 않을지 몰라도, 다른 곳으로는 데려가지 않을 것입니다.
   
    루키우스 술라를 보세요, 키케로.

    내가 바로 당신의 거울입니다."


참고 : 루키우스 술라는 그 유명한 줄리어스 시저보다 한세대전 인물로서 뛰어난 장군이나 강력한 독재자였다.
         심지어 시저가 그와 같은 세대에 태어났더라면 술라에게 패했을 것이라고까지 평가받는 인물이다.

 


4. 힘 없는 정의, 정의 없는 힘, 당신의 선택은?

술라의 답변은 머리를 친다. 아니 때린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1. 정의≠진실, 2. 정의>진실 : 키케로의 사상
1. 힘≠정의, 2.힘>정의 : 술라의 사상(미래의 키케로의 사상)  

진실을 감추었기 때문에 키케코는 더 이상 정의롭지 않다. 하지만 그가 이겼기 때문에 그는 정의가 되었다.
그가 정의가 된 이유는
이겼기 때문이며 그 배경에는 힘(변론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마치 술라가 군사력으로 정의가 된 것 처럼.

힘은 정의를 만들어낸다. 정의가 힘을 만들어내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정의는 진실이어야 하는데 진실은 늘 공격받기 마련이다. (그래서 힘이 없다)
이것이 술라가 하고 싶은 말이다.

세상이 올바르기 위해서는
힘을 가진 자가 정의로워지거나 혹은 정의로운 자가 힘을 가져야 되는데 
술라의 답변은 정확하게 이 명제를 의미한다.


파스칼의 팡세 298 글이 떠오른다.
그래서 두렵다. 이 소설은 '소설'이 아니었다. 뭐지? 이 무시무시한 작가는?




 





 
Posted by 고구마장수